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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HORT STORY

10월에 피는 능금꽃

이효석 · 약 4분 · 1,920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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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0월에 피는 능금꽃

민출한 자작나무(白樺) 밑에서 아귀아귀 종이 먹는 하아얀 산양(山羊) ⎯ 일년 동안이나 나와 벗한 너는 나의 이 무위의 일년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가. 종이를 ⎯ 이야기를 좋아하는 양. 한 권의 책도 많다 하지 않고 두 권 의 책도 사양하지 않는구나. 이 이야기에 배부르면 풀 위에 누워 가지가지 의 꿈을 되풀이하는 애잔한 자태 ⎯ 너에게 이야기를 먹이고 꿈을 주기에 나의 무위의 일년이 마저마저 지내려 한다.

옛성 모롱이 저편에 아리숭하게 내다보이는 한 줄기의 바다 ⎯ 마을의 시 절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. 진하던 바다의 빛이 엷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을 의 가을은 어느덧 깊어졌다. 관모봉은 어느결엔지 눈을 하얗게 썼고 헐벗은 마을은 앙크런 해골을 드러내 놓았다.

헌칠한 벌판에 능금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고 벼이삭이 무거울 때에는 그 래도 마을은 기름지게 빛나더니 이제 풍성한 윤택을 잃은 마을은 하는 수 없이 가난한 참혹한 꼴을 그대로 드러내 놓았다. 마을의 꼴이 참혹하기 때 문에 나는 눈을 돌려 도리어 마을의 자연을 사랑하려고 하였다. 마을의 현 실에서 눈을 덮고 풍성한 자연 속에서 노래를 찾으려 하고. 책상 위에 쌓인 활자의 산속에서 진리를 캐려고 애썼다.

이때부터 서재와 양과 능금밭 사이의 한가한 ‘돈키호테’ 적 방황이 시작 되었다. 거칠은 안개 속에서 구태여 시를 찾으려 하고 연지빛 능금빛 봉오 리 앞에 서서 피지 못하는 내 자신의 하염없는 꼴을 한탄하는 동안에 값없 는 우울한 시간이 흘렀다. 마을의 산문은 그러나 이 무위의 방황을 암독하 게 매질하지 않았던가.

보리의 시절을 앞둔 앞집에서는 별안간의 소동이었다.

“⎯ 이왕 못살 바에야 솥 아니라 집까지 빼 가시오. 이 나그네들, 세×만 세×이구 ⎯ 그래 이 백성들은 어쩌잔 말요 ⎯ .”

‘마매’ 는 펄펄 뛰면서 고함을 쳤다.

그러나 이 고함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소에게 끌린 한 대의 ‘술기’ 가 유유히 뜰 앞을 굴러 나왔다. 장부를 든 면× 서기가 두 사람 그 뒤를 따랐다. ‘술기’ 위에는 ×금 체납으로 처분한 가마밥솥 등이 삐죽이 솟아 나와 보고 섰는 이웃 사람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찔렀다.

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야살스러운 풍경을 말살하여 버리려고 애쓰면서 나 는 마을을 벗어져 석방으로 뛰어나갔다. 들에서 능금밭으로 ⎯ 능금밭에서 자작나무 밑으로. 생활을 떠난 초목의 풍경은 가련한 ‘햄릿’ 을 용납하기 에 진실로 관대함을 깨달은 까닭이다.

그러나 현실은 또한 추근추근하게 척지고 뒤를 좇았다. 집에 돌아왔을 때 에 나는 책상 위 활자의 진리 속에서 한 장의 편지를 발견하였다. 봉투 속 에는 한 장의 편지와 함께 흙덩이도 아니요, ×덩이도 아닌 괴상한 한 개의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. 의아한 생각으로 편지를 읽어 가는 동안에 나는 촌 에 있는 동무의 설명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.

“⎯ 동무여, 놀라지 마시요. 이것은 한 조각의 떡이외다. 마을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먹고 살아가는 떡이외다. 이른봄에 벌써 양식이 떨어져 버린 마을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소나물 껍질을 벗겨다가 약간 남은 수수쌀을 섞어서 떡을 빚기 시작하였소이다. 껍질을 벗기운 솔밭은 볼 동안에 흰 솔 밭으로 변하였소이다. 현명한 동무여, 보시요. 이것은 결코 사람이 먹을 것 이 못됩니다. 마을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다다를 최하층의 세상에 떨어져서 이제는 벌써 인간 이하의 지옥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외다. 백 마디의 나의 감상보다도 이 한 조각의 떡을 참으로 현명한 동무에게 보내는 터이외 다…….”

⎯ 실로 인간 이하이다.

다시 우울하여진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집을 뛰어나가 저물어 버린 마 을 밖으로 향하였다.

먼 산에는 난데없는 불(山火)이 나서 어두워 가는 밤 속에 새빨간 색채가 선명하게 피어올랐다. 그것은 마치 세상을 불사르려는 아귀의 혓바닥같이 널름널름 어둠을 먹어 들어갔다. 찬란한 광채의 반사를 받은 듯이 어둠에 젖은 능금꽃은 밤 속에 우렷이 빛났다.⎯ 여름이 오고 가을을 맞이함을 따라 자연은 기름지게 빛나나 마을의 생활은 한층 한층 더 여위어 갈 뿐이다. 능금밭에는 아름다운 꽃이 지고 열매가 맺 혔다. 새빨간 별을 뿌려놓은 듯이 아름다운 능금이 송이송이 벌판을 수놓았 다.

그러나 이 동안에 피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초라한 ‘햄릿’ 을 계속하여 왔을 따름이다. ⎯ 시간과 방황 속에 곧은 낚시를 드리워 왔을 뿐이다.

시월이 짙어 동짓달을 바라보니 성 모롱이 저편의 바다 빛이 엷어지고 헌 칠한 벌판을 배경으로 앙클한 마을이 속임 없는 똑바른 자태를 그대로 드러 내 놓았다. 앙클한 해골이 이제는 가리울 것 없이 마음을 아프게 에웠다.

그 거칠은 벌판에서 나는 하루아침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. ⎯ 헐벗은 능 금밭 마른 가지에 돌연히 꽃이 핀 것이다. 희고 조촐한 두어 떨기의 꽃이 마치 기적같이 마른 나뭇가지에 열려 있지 않는가. 대체 이런 법도 있는가.

⎯ 너무도 놀란 나는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았다. 건너편 관모 봉의 흰눈과 시월에 피는 능금꽃 ⎯ 이것을 비겨 볼 때 이 시절을 무시한 능금꽃의 아름다운 기개에 다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.

“슬퍼 말라. 시월에도 능금꽃은 피는 것이다!”

별안간 솟아오르는 힘을 전신에 느끼는 나는 감동에 취하여 쉽사리 그곳을 떠나기가 어려웠다. ⎯ 11월 26일 밤

❋ 삼천리 1933.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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