SHORT STORY
피아노
현진건 · 약 5분 · 2,015자
❧피아노
궐(厥)은 가정의 단란(團欒)에 흠씬 심신(心身)을 잠그게 되었다.
보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한 형식상의 안해가, 궐이 일본 xxx대학을 졸업하 자마자 불의에 죽고 말았다. 궐은 중등교육을 마친 어여쁜 처녀와 신식 결 혼을 하였다. 새 안해는 비스듬히 가른 머리와 가벼이 옮기는 구두 신은 발 만으로도 궐에게 만족을 주고 남았다. 게다가 그 날씬날씬한 허리와 언제든 지 생글생글 웃는 듯한 눈매를 바라볼 때에 궐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 었다. 살아서 산 보람이 있었다.
부모의 덕택으로 궐은 날 때부터 수만 원 재산의 소유자였다. 수 년 전 부 친이 별세하시매, 무서운 친권(親權)의 압박과 구속을 벗어난 궐은 인제 맏형으로부터 제 모가치를 타기도 되었다. 새 안해의 따뜻한 사랑을 알뜰살 뜰히 향락하기 위함에 번루(煩累) 많고 방해 많은 고향 ××부를 떠난 궐은 바람 끝에, 꽃 날리는 늦은 봄에 서울에서 신살림을 차리기로 하였다. 위선 한 스무 남 간 되는 집을 장만한 그들은 다년의 동경대로 포부대로 이상적 가정을 꾸미기에 노력하였다.―마루는 한복판에 도화심목(桃花心木) 테이블 을 놓고, 그 주위를 소파로 둘러 응접실로 맨들었다. 그리고 안방은 침실, 건넌방은 서재, 뜰아랫방은 식당으로 정하였다. 놋그릇은 위생에 해롭다 하 여 사기그릇, 유리그릇만 사용하기로 하고, 세간도 조선의(朝鮮衣)걸이, 삼 층장 같은 것은 거창스럽다 하여 전부 폐지하였다. 누구든지 그 집에 들어 서면 첫눈에 뜨이는 것은 마루 정면 바람벽 한가운데 놓인, 큰 체경 박힌 양복장과 그 양편, 화류목으로 맨든 소쇄한 탁자에 아기자기하게 얹힌 사기 그릇, 유리그릇이리라.
식구라야 단 둘뿐인데 찬비(饌婢)와 침모를 두고 보니 지어미의 할 일도 없었다. 지아비로 말하여도 먹을 것이 넉넉한 다음에야 인재를 몰라 주는 이 사회에 승두미리(蠅頭微利)를 다툴 필요도 없었다. 독서·정담·화투· 키스·포옹이 그들의 일과이었다.
이 외에 그들의 일과가 있다고 하면 이상적 가정에 필요한 물품을 사 들이 는 것이리라. 이상적 안해는 놀랄 만한 서리(犀利)한 관찰과 치밀한 주의로 써 이상적 가정에 있어야만 할 물건을 찾아내었다. 트럼프, 손톱 깎는 집게 같은 것도 그 중요한 발견의 하나이었다.
하로는 안해는 그야말로 이상적 가정에 없지 못할 무엇을 깨달았다.― 그 것은 내가 어째 입때 그것 생각이 아니 났는고, 하고 스스로 놀랄 만한 무 엇이었다. 호올로 제 사색의 주도(周到)한데 연거푸 만족의 미소를 띠우며, 마츰 어데 출입하고 없는 남편의 돌아옴을 기다리기에 제삼자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지리하였다.
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안해는 무슨 긴급한 일을 말하려는 사람 모양으로 회 오리바람같이 달겨들었다.
“나 오늘 또 하나 생각했어요.”
“무엇을?”
“그야말로 이상적 가정에 없지 못할 물건이야요!”
남편은 빙그레 웃으며, “또 무엇을 가지고 그리우?”
“알아 맞춰 보셔요.”
안해의 눈에는 자랑의 빛이 역력하였다.
“무엇일까……?”
남편은 먼 산을 보기도 하고, 이리 저리 세간을 둘러도 보며 진국으로 이 윽히 생각하더니, 면목 없는 듯이, “생각이 아니 나는 걸…….”
하고, 무안새김으로 또 한번 웃었다.
“그것을 못 알아 맞추셔요.”
안해는 배앝는 듯이 한 마디를 던지었다. 한동안 남편의 얼골을 생글생글 웃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, 무슨 중대한 사건을 밀고하려는 사 람모양으로 입술을 남편의 귀에다 대고 소근거리었다.
“피아노!”
“오 옳지! 피아노!”
남편은 대몽(大夢)이 방성(方醒)하였다는 듯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. 피아 노가 얼마나 그들에게 행복을 줄 것은 상상만 하여도 즐거웠다. 멍하게 뜬 남편의 눈에는 벌써 피아노 건반 위로 북같이 쏘대이는 안해의 보얀 손이 어른어른하였다.
그 후 두 시간이 못 되어 훌륭한 피아노 한 채가 그 집 마루에 여왕과 같 이 임어(臨御)하였다. 지어미 지아비는 이 화려한 악기를 바라보며 기쁨이 철철 넘치는 눈웃음을 교환하였다.
“마루에 무슨 서기(瑞氣)가 뻗친 듯한걸요.”
“참 그래, 왼 집안이 갑자기 환한 듯한걸.”
“그것 보시오. 내 생각이 어떤가?”
“과연 주도한걸. 그야말로 이상적 안해 노릇 할 자격이 있는걸.”
“하하하…….”
말끝은 웃음으로 마치었다.
“그런데 한번 쳐 볼 것 아니오? 이상적 안해의 음악에 대한 솜씨를 좀 봅 시다그려.”
하고, 사나이는 행복에 빛나는 얼골을 안해에게로 향하였다. 계집의 번쩍이 던 얼골은 갑자기 흐려지고 말았다. 궐녀의 상판은 피로 물들인 것같이 새 빨개졌다. 궐녀는 억지로 그런 기색을 감추려고 애를 쓰며,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, “먼저 한번 쳐 보셔요.”
하였다.
이번에는 사나이가 서먹서먹하였다. 답답한 침묵이 한동안 납덩이같이 그 들을 누르고 있었다.
“그러지 말고 한번 쳐 보구려.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야 무엇 있소?”
이윽고 남편은 달래는 듯이 말을 하였다. 그러나 그 소리는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.
“나…… 나 칠 줄 몰라.”
모기 같은 소리로 속살거린 안해의 두 뺨에는 불이 흐르며 눈에는 눈물 그 림자가 어른거리었다.
“그것을 모른담!”
하고 남편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웃고는, “내 한 번 치지.”
하고, 피아노 앞에 앉았다. 궐도 또한 이 악기를 매만질 줄 몰랐다. 함부로 건반 위를 치훑고 나리훑을 따름이었다. 그제야 안해도 매우 안심된 듯이 해죽 웃으며, 이런 말을 하였다.
“참, 잘 치십니다그려.”
(1919년 9월)
(『개벽』, 1922. 11.)