SHORT STORY
물벼락
최서해 · 약 3분 · 1,300자
❧물벼락〔掌篇小說[장편소설]〕
십자교(十字橋)를 건너가려다 눈에 뜨이는 그림자가 있기에 바라보았다.
먼 불빛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미끈한 몸에 얼리는 소복으로 신바닥에 흙이 묻을세라 사뿐사뿐 걸어오는 그림자는 그의 가슴을 간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. 그는 여자의 치마폭 여민 팔꿈치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. 여자는 돌 려다보는 듯 마는 듯 태연히 걸어간다.
그는 서너 걸음이나 나오다가 다시 돌아다보았다. 서너 걸음이나 나가면 여자도 다시 돌아다본다. 여자의 시선은 어떻게 흔들렸는지? 어두움에 흐려 서 보이지 않는 그것이 그에게는 도리어 은근한 맛이 있었다.
"대서? 대서 볼까?"
개천을 왼편에 끼고 간동으로 너댓 집이나 지나 올라가던 여자는 또 슬쩍 돌아다본다. 길옆 집 문등 빛에 갸름한 얼굴이 반짝 보였다.
아까보다 빨리 걸어가던 여자는 컴컴한 골목에 돌아지더니 쓰러져 가는 초 가집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.
대문 안에 몸을 숨긴 여자는 문 밖에 대어선 사내를 방긋이 내다보면서 손 짓과 몸짓으로 군호를 주는 듯하고 스러져 버렸다. 그는 그것을, ‘잠깐만 기다리세요! 안에 가 보고 나올께……. 누가 알면 큰일납니다.’ 하는 암시 로 해석하였다. 그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. 붉은 입술, 부드러운 곡선미, 향 긋한 살냄새 ─ 벌써부터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무엇은 초초분분 무르녹아 들어간다. 단꿈에 째릿한 가슴은 엷은 공포에 스르르 흐리기도 하였다.
‘지금 나오나? 아니다. 저건 문 소리다.’
그는 피 뛰는 소리에 멍멍한 귀를 기울여서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엿들으려고 하였다. 나온다! 신 소리가 들린다. 일각이 삼추 같은 그의 귀 에 가까와오는 여자의 발자취는 그에게 큰 쇼크를 주었다. 부드러운 살 향 기가 서리인 이불 속에 온몸이 푸근히 싸이는 것 같았다. 대문이 삐 ─ 꺽 열린다. 그는 성공의 기쁨에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나오는 그림자를 끌 어안을 듯이 거의 본능적으로 팔을 벌렸다.
"배라먹을 녀석! 버르쟁이를 가르쳐야……."
빽 쏘는 소리가 도리어 늦다 할이만치 끼얹는 차디찬 물은 폭포와 같이 사 내의 전신에 내리질렸다. 몸을 움찔하던 사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몸 을 돌쳐 뛰려다가 건너편 담벼락에 이마가 부딪쳐 펄썩 주저앉자 마자 물벼 락이 나오던 대문 안으로부터 세숫대야가 튀어나오면서 그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땅바닥에 뎅그렁 떵 떨어졌다. 대야 벼락까지 떨어지자 물투성이 된 몸에도 열(熱)이 남았던지 두 눈에서 불이 번쩍 일어났다. 그는 모자가 벗 어진 줄도 모르고 발〔足[족]〕아! 나 살려라! 내뛰었다. 천방지방 달음질 을 쳤다.
조용한 골목에 돌아진 그는 비로소 발을 멈추었다. 가슴에서는 맞방망이질 을 하고 두 어깨는 급한 물결을 친다. 숨을 돌려 가면서 모든 것은 꿈 같기 도 하면서 꿈 아닌 것이 원수 같았다. 벗어진 머리를 만지면서 맑갛게 개인 날에 물투성이 흙투성이 된 꼬락서니를 굽어보니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하였다. 그것은 호소할 데 없는 분이요, 슬픔이다. 제일 집에는 어떻게 가며, 큰길에는 어떻게 나서랴? 똥그란 아내의 눈도 얼찐 보 이고 행순 순사의 그림자도 어디로선지 나타나는 듯 하였다.
‘꿈이나 되었으면.’
길가의 돌까지 비웃는 듯한 느낌에 으슥한 그늘에 들어서는 그는 혼자 뇌 이면서 또 한번 머리를 만지고 의복을 보았다.
이른 봄밤은 물투성이 된 그에게 겨울밤같이 찼다.
흥분이 스러진 그는 냉수 벼락 여독에 덜덜 떨었다. 도수가 좀 더 떨어지 면 불이 번쩍 나던 대야 벼락이 그리울는지도 모를 것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