← 서재로

SHORT STORY

향수

최서해 · 약 7분 · 3,290자

❧

鄕愁[향수]

먼 산은 푸른 안개에 윤곽이 아른하고 담밑에 저녁 연기가 솔솔자자 흐를 때였 다. 축은한 땅 위에 부드럽게 내리는 이른 봄 궂은 비는 고독한 나그네의 수심을 한껏 돋운다.

전등도 켜지 않은 방 미닫이를 반쯤 열어 놓고 컴컴한 황혼 속에 내리는 빗소리 를 듣는 나의 몸과 마음은 농후한 자주빛 안개 속으로 점점 스러져 들어가는 듯 하였다.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. 기름을 붓는 듯이 매끄럽게 들리는 빗소 리, 삼라만상을 소리 없이 싸고 도는 으슥한 빛, 모든 것은 끝없는 솜같이 부드 러운 설움을 휩싸서 여지없는 듯하다. 그 설움은 내 옷을 축은히 적시고 온 모공 (毛孔)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서 혈관을 뚫고 붉은 피를 푸르게 물들여서 내 온 몸을 안팎 할것없이 속속이 싸고 도는 듯이 안타깝고 아쉽고 그리워 무어라 형용 할 수 없는 애수를 가슴에 부어 넣는다.

아아 감개무량한 날이요, 감개무량한 황혼이다. 나는 이 봄을 당할 때마다 칠 년 전 옛 봄을 생각한다. 한 번 간 후로 소식이 묘연한 김군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.

때는 일구일구년 삼월 이십 오일이었다.

나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 김우영군께서 그가 고국을 떠난다는 마지막 편지 를 받은 날이다. 그것은 내가 그에게 써 보낸 편지의 회답이었다.

김우영의 회답

군의 편지는 어저께 받았다.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무어라 하면 좋을지 모른다. 꿈 같기도 하고 거짓 같기도 하다. 그러나 또렷한 군의 필적이거니 이제 무엇을 다시 의심하랴? 나는 밤새껏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었다. 울기는 벌써 때가 지난 줄 내 모르는 것이 아니건만 나오는 눈물을 어찌하랴? 집 떠난 지 오 년 사이에 내 사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린것이 죽고 이제 남았던 아내까 지 죽었으니 아아 무슨 바람과 무슨 면목으로 이제 다시 고향을 밟으랴?

올해는 어떨까 내년에는 어떨까 하여 해가 갈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맹세하 고 바랐으나 몸은 점점 괴로울 뿐이고 모든 것은 뜻같이 되지 않아서 고향으로 못 돌아갔다. 이리하여 세월도 나를 속였거니와 나도 세월을 속였으며 내 사랑하 던 식구까지 속였구나.

작년 가을에 이곳으로 온 것은 이역상설에 너무도 고향이 그리워서 고국 땅이라 도 밟아서 한걸음이라도 고향 가까이 있어 보려는 진정으로 온 것이다. 그러나 이곳에 와서도 노동자의 무리에서 비지땀을 짜게 되매 역시 낭탁이 비었다. 가난 에 우는 처자를 버리고 떠나서 한푼 없이 어찌 돌아가랴. 그네들은 죽는 때에 눈 을 못 감았으리라. 아아 이 무정한 나를 얼마나 바라고 기다렸으랴. 나도 목석이 아니거니 어찌 그것을 모르랴. 생각할수록 가슴이 터지는 듯하다.

나는 가련다. 저즘께 차 버렸던 만주나 서백리아로 가련다. 그러나 나는 고국에 많은 애착을 두고 간다. 이 몸이 떠나는 때 그 자국자국에 괴일 눈물의 뜻을 군 은 알 것이다.

죽어서 만약 영혼이 있다 하면 나는 고향으로 가련다. 부모처자의 영혼을 따라 고향 가서 이 가슴의 설움을 끝까지 아뢰고자 한다.

잘 있거라. 그러나 군의 목숨이 붙어 있는 때까지 이 세상에는 김우영이라는 친 구가 있었더라는 것을 잊지 말아 다오.

삼월 이십 삼일 김우영 씀.

이우춘군.

그날도 이렇게 비가 뿌렸다. 사랑하는 벗의 쓰라린 편지를 고즈넉한 봄비 속에 서 읽을 때 나는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개의 가슴을 만졌다.

김우영군이 고향 있을 때 일이다. 하루는 그리 몹시 불던 바람이 자더니 곧 검 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었다. 우중충한 날이 반나절이나 계속되다가 해넘어 갈 때 부터 함박꽃 같은 눈이 펄펄 내렸다. 눈은 밤새껏 퍼부어서 온 거리에 솜같이 쌓 인 위로 새벽부터 바람이 건너기 시작하였다.

해 오를 임박에는 바람 형세가 맹렬하였다. 노한 바다 소리같이 우-하고 서북으 로부터 쏠려 내려올 때면 지진난 것처럼 집까지 흔들흔들하는 듯하였다. 눈가루 가 창문을 치는 때면 모래를 뿌리는 듯이 쏴 -하며 뚫어진 구멍으로 막 뿌려들 다. 울타리 말장이 부러지는지 뉘집 지붕이 떠나가는지 우직끈 뚝딱 덩그렁 철썩 하는 소리는 온 생령으로 하여금 점점 몸을 옹송그리게 한다.

식전부터 순사들은 돌아다니면서 눈을 치우라고 야단이다. 그러나 쓸어 놓으면 또 뿌려 오고 낯을 들면 눈이 뿌려서 옴짝할 수 없었다. 그러나 경관들은 칼소리 를 내고 돌아다니면서 못 견디게 굴었다.

나는 화로를 끼고 앉았다가 하는 수 없이 밖에 나섰다. 천지는 뿌여서 눈안개 속에 잠기고 칼 같은 바람은 뺨을 후린다. 나는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는 우영군 집으로 갔다. 둘이 협력하여서 눈을 치워 보려고 생각한 까닭이다. 우영군 집 마 당에 들어서니 그 집 온 식구들은 벌써 밖에 나왔다. 우영군의 아내는 맨발에 떨 어진 짚세기를 끌고 낯이 파랗게 질려서 흙마루에 뿌린 눈을 쓸고 있다. 그리고 우영군은 차디찬 눈뿌린 툇마루를 짚고 앉아서 흑흑 느껴 가면서 눈물을 떨어뜨 린다. 나는 웬일인가 하여 눈이 둥그레서, “자네 왜 우나? 응?”

하고 물었다. 그러나 우영군은 아무 대답이 없고 마루 밑에 떨어진 짚세기를 찾 고 있던 그의 늙은 어머니가 머리를 돌려 나를 보면서, “자네 왔나?”

하고 어색한 소리로 말한다.

“네! 안녕히 주무셨읍니까? 그런데 우영군이 왜 저러고 앉았어요?”

“응 그 급살을 맞을 놈들이 그 애를 때렸네! 에구 그 언 뺨을 그놈들이 사정없 이도 때리데.”

“누가 때려요?”

“순사놈들이 때리지 누가 때리겠나!”

“순사가 왜 때려요?”

“눈치라 얼른 나오잖는다구 그 구둣발로 차고 그것도 부족해서 뺨까지 때렸다 네! 에구 망할 놈의 세상두…….”

그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우영군을 본다. 나도 보았다. 팔뚝이 빠진 헌 양복저고리를 입고 울던 우영군은, “내가 아무 때든지 이 설치를 해야지.”

하며 마루를 꽝 때린다.

“이 사람아! 울 것 있나?”

“너무도 억울해서 그러네! 이놈의 사회가 언제까지 이 모양으로 갈는지?”

우영군과 나는 들채에다 눈을 담아서는 앞개울로 내다 버렸다. 그런데 우영군은 우리 노동자 가운데서는 꽤 든든한 편인데 이날 아침에는 숨이 차서 헐떡헐떡하 며 이마에 땀이 내돋아서 서리가 뿌-옇다.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는 휭 하고 자 빠지거나 비틀비틀 하고 잘 걷지도 못한다.

“이 사람이 오늘 아침에는 왜 이리 자빠지나? 허허!”

나는 농담을 하면서 들채를 들다가 쓰러지는 그를 보고서 웃었다.

“에구! 벌써 세 끼나 굶었으니 무슨 기운이 나겠나!”

마루에 서서 우리를 보던 우영군의 어머니는 탄식처럼 뇌인다.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그만 맥이 풀렸다. 나는 겨죽이나마 배불리 먹고 굶은 그네들 앞에 선 것이 죄송스럽기도 하고 고생을 죽도록 해도 근근히 생명을 이어 가는 우리네 팔자가 너무도 억울하였다.

그 후 며칠을 지났었다. 하루는 우영군이 나를 찾아와서, “나는 떠나려네!”

“응, 어디로?”

“간도나 해삼위로 가려네!”

“거기는 가서?”

“암만해도 이 상태로는 늘 이 꼴이 되겠으니 어느 금광이나 탄광에 가서 좀 벌 어 보겠네.”

“이 사람아, 식구들은 어찌할 작정인가?”

“”어쩌다니? 방책이 없지!”

“괜히 고생만 더하게 되기 쉬우니 잘 생각하게나!”

“자네 아직도 못 깨달았나? 우리가 여기서 고생을 더하면 얼마나 더하겠나! 나 는 내 일생에 고생을 피하거나 벗으려고 하지 않네. 글쎄 그러면 그것은 마음만 상하지 쓸데 있나. 나는 어떤 고통이든지 지긋지긋 밟고 나가서 그것을 이기려고 하네. 어쨌든지 살아 보려고 하네. 내가 떠나는 것은 좀 웬만하면 식구들을 배나 주리지 않게 할까 함일세. 내가 굶은들 상관 있나마는 식구들 굶는 꼴은 참 못 보겠네. 어디 가 보아서 좋으면 몇 달에 얼마씩이라도 보내게 될 터이지.”

“글쎄 그렇다면 모르거니와 참 딱하네.”

그 후로 그는 서백리아로 북만주로 찬비와 쓰린 눈을 무릅쓰고 돌아다녔다. 그 러나 집에는 돈 한푼 못 보내었다. 그의 식구는 열흘이면 엿새는 굶었다. 그후 오년 만에 우영군은 경흥 웅기에 왔다는 편지가 있었다. 그 편지를 받던 후로 그 의 식구들은 그의 오기를 더욱 기다렸다. 그 어머니는 늘 이런 편지를 그에게 부 쳤다.

그러자 그 이듬해 봄에 독감이 유행하여 그의 식구들은 하나 남지 않고 죽었다.

“우리 우영이는 어째 안 오는가? 응! 우영이 왔나?”

그 어머니는 죽을 때에 곁에 앉은 나를 보고 여러 번 물었다.

이 식구들의 죽은 소식을 들은 김우영군은 마지막 편지를 나에게 주고 웅기를 떠나서 또 해외로 갔다. 그것이 벌써 칠 년 전 옛일이다.

김우영군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? 나도 그 후로 고향을 떠나서 타관에 유리표박 하게 되면서부터 다년 생활에 몰려서 어떤 때면 그를 잊다시피 생각지 않는다.

그러나 이 봄을 만나고 더욱 궂은 봄비 뿌리는 때면 그가 그립고 고향이 그립다.

작년인가 풍편에 들으니 김우영군은 모스크 ✕✕회에서 활동한다 하나 자세한 소 식은 못 된다.

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도 살아 있다 하면 내가 그를 생각하는 이만치 그도 나를 생각할 것이며 내가 고향을 그리는 것처럼 그도 고향을 그릴 것이다. 천리 에 방랑하는 두 혼의 가슴에 타는 애수는 언제나 언제나 스러질까? 인생이 있는 동안에는 이 설움은 늘 있을 것이다. 창앞에 빗소리는 그저 그치지 않았다.

편안한 읽기

오래된 문장, 새로운 발견.

설정과 읽던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됩니다.

이 작품의 원문

단편서가에 대하여

영상으로 새롭게 만날 이야기를 찾으며, 한국 단편 문학 260편을 모았습니다.

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만료저작물을 바탕으로 합니다. 원작의 표현과 옛말을 유지했으며, 읽기 화면에서는 줄바꿈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. 작품마다 원본 파일과 출처를 함께 제공합니다.

일부 작품의 세부 장르와 본문 정확성은 추가 대조 중입니다. 영상 제작과 해외 공개에 앞서 원문과 이용 범위를 확인해주세요.

책갈피와 읽기 기록은 기기 간 동기화되지 않습니다. 브라우저 데이터를 지우면 함께 삭제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