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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HORT STORY

송첨지

김동인 · 약 15분 · 7,193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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宋[송] 첨지

소설 쓰는 사람에게도 각각 다른 버릇이 있어서 예컨대 작품 중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이름에 있어서도 가령 이러이러한 성격과 환경의 인물을 등장 시키려 하면, 그런 사람이면 이런 이름을 붙이어야 적당하리라, 혹은 또 이 런 이름의 사람은 여사여사한 성격을 가지고 여사여사한 과거, 혹은 환경을 가지어야 될 것이다. ─ 이러한 일종의 독특한 취택벽(取擇癖)이 있다.

그 예에 벗어나지 못하여 나 이 김동인이는 가령 ‘송 첨지’라 하는 인물 을 소설의 주인공 내지 한 등장인물로 쓰고자 하면, ‘송 첨지’라는 이름 에 따라서 ‘송 첨지’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면 그 생김생김은 이러하고 나이는 얼마쯤이며 성격은 어떠어떠한 사람이리라 ─ 적어도 그러한 인물이 아니면 맞지 않으리라. 이러한 예정 혹은 코스가 있다.

그래서 나는 지금 ‘송 첨지’라는 인물 하나를 붙들어서 그의 생애사(生 涯史)의 한 토막을 독자 앞에 공개하고자 하는데, 우선 가령 ‘송 첨지’라 하면 얼른 듣기에 ‘복덕방’이라는 시양목 휘장 앞에 긴 걸상 놓고 딱선부 채 딱딱거리며 곰방대 물고 눈이 멀찐멀찐 행인(行人)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로(中老)의 집주름쯤으로 여기기 쉬울 것이나, 내가 지금 적고자 하 는 송 첨지는 학슬 대신 에보나이트 안경을 쓰고 양복 비슷한 옷에 넥타이 도 매고 좀 모양은 없으나 단장도 짚고, 일본 말은 무론 영어도 제법 하고, 구두도 신고- 나이는 오십 안팎 ─ 송 첨지라기보다 ‘송 주사’라든가 ‘송 선생’이라든가 하여야 빨리 인식될 ─ 판에서 벗어난 종류의 사람이 다.

송 성(宋姓)을 대표하는 우암(尤庵) 송시열(宋時烈)이 몸은 정승까지 지냈 으나 생김생김이며 차림차림이며가 끝까지 한 촌부자(村夫子)연 하였던 관 계로 후일 ‘송씨’라면 얼른 촌부자연한 느낌을 일으키게 하는지 모르지 만, 우리의 송 첨지도 그 칭호만 듣는 것과 실제 인물과의 새에는 꽤 상위 점이 있다.

첨지라기보다 ‘선생’이라든가 ‘주사’라여야 좋을 우리의 송 첨지는, 사실 면주사(面主事)노릇도 해보았고, 선생 노릇도 해본 사람이다. 그러니 까 역시 송 주사라든가 송 선생이라야 옳을 사람이다.

학업은 동양의 학도(學都)인 일본 동경에 가서 닦았다.

학운(學運)은 좋았던 모양으로 열일곱 아직 어머니의 품 그리울 시절에 어 떤 고마운 후원자의 덕으로 현해탄을 넘어가서 그때 한창 명치(明治)의 건 설시대를 지나서 대정(大正)의 난숙(爛熟)일본의 공기를 호흡하며 꿈 많고 희망 많은 소년기를 이역에서 보낸 것이었다.

미개(未開)한 토인들이 사는 열도(列島)를 한데 뭉쳐서 한 개의 근대국가 (近代國家)를 형성하여 세계 열강의 틈에 끼도록 끌어올린 일대의 영걸 목 인(睦仁) 일본 황제는 마지막으로 대한합병이라는 위업을 끼쳐놓고 조상들 의 나라로 떠나고 그의 아들 가인(佳人)이 당주 ─ 아비는 벌고 아들은 호 사하고 손주 대에는 망한다는 천칙(天則)에 따라서 표면만은 무르익고 찬란 한 대정 동경(大正 東京)에 이 고아(孤兒)는 그의 몸을 내어던진 것이었다.

합병된 지 불과 사오 년… 조선 안에는 각곳에 그냥 의병(義兵)이 끓고 있 고, 사내, 장곡천(寺內, 長谷川)두 군인의 군정이 ‘조선’이라는 순을 줄 [鑪]질하는 공황 시대에 송 군은 동경서 학업을 닦았다.

시대가 시대니만치 조선 유학생은 대개 정치나 법률에 적(籍)을 두었다.

송 군도 정치를 전공하였다.

내년이면 학업도 끝난다는 그 전해에 송 군은 묵어 있던 사숙(私宿) 주인 의 딸과 눈이 어울리어 딸자식 하나를 낳는 바람에 부득이 안해로 맞아 이 듬해에 조선으로 데리고 돌아왔다.

금의환향이라 하지만 송 군의 환향은 결코 금의가 아니었다. 그의 학비를 대어주던 은인도 그가 일본 계집애와 어울린 것을 알자 거래를 끊고 말았 다.

금의환향하는 송 군을 위하여 조선서는 어떤 시골 면서기의 자리가 마련되 어 있었다. 송 군은 송 주사가 된 것이었다.

유학 당시의 그의 막연한 희망 내지 목표는 대신(大臣)에 있었다.

그러나 ‘나라도 없는 인종’이라는 자기의 현실적 입장과 이상(대신)과를 연결하여 생각할 때에 뚝 떨어지면서 도장관, 도장관도 과하니 내무부장, 아니 군수(또 다시) 면장이라도, 이렇듯 숙어들어가는, 면장 한자리도 얻지 못하고 겨우 면서기로 낙착이 된 것이었다.

면서기 재근 이 년, 이 년간이나 재근했으면 그래도 약간 지위가 오를듯싶 은데 면서기라는 구실은 오를 데도 없는 양하여 그냥 그 자리에 눌러붙어 있었다.

이 사실이 적지 않게 우울하던 차에 그의 안해가 일본인인 서무주임과 새 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.

본시부터 애정이 있어서 결혼한 바가 아니요, 딸자식이 하나 생기기 때문 에 결혼했던 바라 핑계 좋게 안해와 헤어졌다. 동시에 그 서무주임 아래서 일하기가 싫어서 면서기도 사임하였다.

십 년에 한 번씩 큰 전쟁을 해온 일본의 군국주의는 그 기한 십 년을 그저 넘길 수가 없어서 이번은 일독전쟁을 치렀다. 독일의 군국주의는 연합군의 무력으로 부수었다. 그리고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.

그 강화회의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라 하는 금간판을 내걸었 다. 어떤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자신의 의사대로 결정할 것이라는 주의였 다. 즉 예컨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어야 하느냐, 벗어나야 하느냐 하는 것 은 조선 민족 자신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.

일본 육군 원수인 조선총독 사내정의(寺內正毅)의 강압정책에 눌려서 그 새 십 년간 찍소리 못하고 있던 조선인의 마음에 이 한 마디는 커다랗게 들 어맞았다.

“민족자결!”

“민족자결!”

온 조선의 지하로는 이 한 마디가 홍수와 같이 싸다녔다.

이월 초여드렛날, 동경 유학생의 집단에서는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다.

조선 총독부는 온 헌병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무슨 사고가 일지 못하게 하고자 만전의 책을 다하였다.

그러나 민족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이 물결은 경찰력 헌병력의 담으 로도 어찌할 바이 없었다.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스스로 믿는 데가 있었다.

그 새 십 년간을 그만치 강한 힘으로 눌러 놓았으니 조선인의 마음에는 딴 생각 품을 여지며 용기가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다. 설사 한두명 혹은 불온 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쯤은 단 한 마디의 호령으로 삭아 버리리라. 어디 감히 맞서고 덤벼들 광인(狂人)이 있을 줄은 꿈에도 안 생 각했다.

이러한 철통 같은 총독부의 감시와 틈새틈새로는 민족의 의사가 자유로이 흘러다녀 삼월 초하루 ─ 고종태황제(高宗太皇帝)의 인산(因山)날 삼천리 강산에는 그야말로 청천의 벽력으로, “조선 독립 만세.”

의 우렁차고 힘있는 구호는 폭발이 되었다.

안해와도 이별하고 면소도 사직한 송 주사. 약간한 퇴직금으로 삭월셋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다시 무슨 직업을 얻으려고 턱을 팔굽에 고이고 엎드려 코털을 뽑고 있을 때에 무슨 아우성 ─ 드렁장수의 소리도 아닌 ─ 이 들려 오므로 부시시 일어났다.

들을 지나 길에 나서서 비로소 알았다. 조선 독립이 선언되고 그것이 기쁘 다고 온 장안은 그것으로 이 아우성을 한다고.

머리를 들어 보매 맞은편에서도 수십 명의 군중이 팔을 두르며 만세를 부 르며 이리로 달려온다.

송 주사는 칵 가슴에 무슨 덩어리가 뭉쳐오르고, 눈앞이 아득하여 몸을 비 츨비츨 가까운 남의 집 담벽에 기대었다.

송 주사는 무슨 특별한 애국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.

독립이 되면 무론 반갑고 기꺼운 일이지만, 안 된다고 큰 불편 부자유도 느껴 본 일이 없었다. 일본이 가운데 괘씸한 놈도 많지만 조선 사람이라고 다 달가운 사람도 아닐 것이다.

아직껏 특별히 독립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 본 일도 없었다. 일본 유학할 때 학우회(學友會)의 웅변회 같은 날, 혈기의 청년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망 국 한탄을 부르짖는 것을 들으면, 역시 정치과에 적을 둔 망국 청년이니만 치 일종의 공명을 안 느끼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로서의 절실감 까지는 느껴 본 일이 없었다.

말하자면 그 방면에는 매우 신경이 둔하던 것이었다. 감각도 둔한데 다가 송 주사로서는 주사 독특의 견해가 있었다. 즉 독립국민 노릇을 하기에는 조선의 민도(民度)는 좀 얕다는 견해였다. 이 민도의 백성에게 갑자기 ‘독 립’이라는 호박이 떨어지면, 감당을 못하리라는 그의 견해였다.

그런지라 ‘조선’과 ‘독립’을 연결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었고, ‘민족 자결주의’로 세계의 약소민족이 한결같이 술렁거리고 저선의 지식층들도 적지 않게 이 문제에 관심하여 조용한 골방이나 사랑방을 고를 동안도 송 주사는 오직 (면서기 아닌) 새 밥자리를 몰색해 볼 뿐, 정치와 출신의 젊은 이다운 공상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다.

그렇던 송 주사의 앞에 오늘 홀연히 ‘조선 독립’이라는 위대한 소식이 뛰쳐든 것이다.

이치로 따지자면 ‘조선 독립’을 지금껏 그다지 신통히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는 송 주사라 오늘의 이 보도에도 비교적 무관심해야 할 것이었다.

그런 송 주사이언만 지금 행길에서 그의 고막을 두드리는, “조선 독립 만세.”

의 한 마디에 휙 온몸의 피가 얼며, 그 자리에 목박힌 듯이 서 버렸다.

망두석같이 한참을 서 있다가 송 주사도 그 군중들 틈에 빨리어 들어갔다.

“만세에. 만세에. 조선 독립 만세.”

군중들의 소리에 화하여 송 주사도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동서남북으로 헤매었다.

절실히 말하자면 송 주사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목표로 무슨 뜻으 로 하는지 추호도 이해는 커녕 인식도 못하였다. 지고(至高)한 하늘의 분부 에 의지하여 무의식 무인식적으로 행한 노릇이 손을 높이 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그 행동이었다.

그것은 민족의 의사였다. 그리고 또한 하늘의 의사였다. 송 주사 자신으로 는 행하려 한 일도 없었고, 행하여야겠다고 생각한 일도 없었고, 누구의 시 킴으로 한 일도 아니요 스스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의식도 못하는 가운데 서 저절로 행하여진 일이었다. 그리고 평일에 어느 누가 송 주사에게 대하 여 그런 일을 해보라고 권고하는 이가 있었더면, 송 주사는 그 사람을 ‘광 인(狂人)’으로 단정키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.

저녁때 솜과 같이 피곤하고 하루 종일의 난무(亂舞)로 꼴이 ‘미치광이’ 같이 되어 허덕허덕 내 집으로 돌아왔다.

뜰에 들어서며 보매 주인집 어린 아들(칠팔 세 가량 된) 이 뜰에서 놀고 있다.

한 지붕 아래 한 울안에 살면서도 딴나라 사람같이 서로 아는 체 안하던 새였지만, 이 날따라 송 주사의 마음에는 동포(同胞)라 하는 새 관념이 생 겨 남 같지 않아서 애교의 미소를 띠면서 소년에게 가까이 갔다.

“이 좋은 날 너는 만세두 안 부르구 집에 백여 있었니?”

“왜 안 불러요?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인데요.”

“그래? 독립돼서 참 반갑다. 너 올에 몇 살이더라?”

“여덟 살예요.”

소년의 이 대답에 송 주사는 오연히 허리를 젖겼다.

“여덟 살이면 너는 왜종(倭種)이로구나. 그러려니 애처로워라. 이 기쁜 날을 너는 기뻐할 자격이 없어. 열 살 이하의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왜종이 야. 우리같이 광무(光武)년대나 융희(隆熙)년대에 태어난 사람이고서야 오 늘이 기쁜 날이지 너는 빠지거라.”

그는 광무년대에 난 사람이노라는 우월감이 무럭무럭 일어, 소년에게 한 마디의 경계를 남기고 막 자기 방으로 향하려 할 때에, 소년(대정년대에 난)의 아버지가 싱글싱글 하면서 송 주사에게로 향하였다 ─.

“송 주사 나리 선견지명이 참 귀신 같단 말씀이어. 장망지국(將亡之國)의 벼슬을 버리시자, 새 나라이 생겨 납니다그려. ─ 그런데 제 자식더러 ‘왜 종’이라 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 대해서 나리께 항의합니다. 부모가 아울러 한국 신민이어든 자식이 어째 왜종입니까. 남의 귀중한 자식에게 왜종이란─ 대체.”

여기서 누구든 한쪽이 웃어 버리면 문제는 끝날 ─ 아주 단순한 일이다.

그러나 송 주사의 고집이란 천하무류인데다가 집주인은 귀한 아들을(당시에 있어서 가장 큰 용인) 왜종이란 악구를 받았는지라 좀체 양보의 조짐이 안 보였다.

“한국이 없어진 뒤에 났으니 왜종 아니구 뭐요?”

“부모가 다 한종인데두.”

“부모 아니야 한아비가 한종이래두 한국 없을 때 어떻게 한종이 있겠 소?”

“호랑이 새끼가 곰의 굴에서 났다구 곰이 됩디까?”

“곰의 새끼지.”

논란은 차차 억설로 벋어갔다 욕설로까지 전개되어 갔다.

“어디서 찌께(蛔虫) 같은 물건 하나 싸 가지고 꼴에 제법 조자룡(趙子龍) 이나 낳은 듯키.”

“부모네 승강이면 승강이지 남의 집 귀동은 왜 걸거들어가는 게야.”

차차 악화하는 논란 ─.

“저 따위가 백성이랍쇼 있으니까 되려던 독립도 틀려나가겠다.”

“무얼! 독립에 군소릴 끼어?”

딱 ― 쳐라! 완력, 폭력으로까지 발전되었다.

이리하여 그 저녁으로 송 주사는 그 집을 떠나서 다른 데 이사하였다. ─ 송 주사가 애국주의자로 변한 것이 이때부터였다.

기미년 삼월 초하룻날 온 조선에 걸치어 폭발된 만세사건은 표면으로는 십 수만 명의 감옥 죄수와 중국 상해에 한국 임시정부로 남긴 뒤에 사라졌다.

감옥의 죄수들은 만기가 되면 출옥할 것이다. 상해의 한국 임시정보는 국 제적으로 승인을 못 받고 국내적으로는 조선 내지와도 연락이 미미하여 존 재가 아주 미약하였고, 경제적으로도 유지가 곤란한 가운데서 몇몇지도자의 오직 열성만으로 버티어 가는 가운데서 차차 사람의 기억의 표면에서 엷어 갔다.

면서기의 자리를 내어던진 송 주사는 구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사 노릇을 시작하였다.

주변성이 없는 송 주사 ─ 송 선생이라 어느 튼튼한 학교에 교원으로 자리 잡을 기회는 얻지 못하고 이곳저곳 사립학원이나 개인교수 등으로 근근히 기아나 면하며, 이리저리 유랑하였다.

애국주의자로 전향한 송 선생 ─ 그 전향이란 것이 임시적 방편이라든가 빵 문제 떄문에 한 노릇이 아니고, 그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던 동포 관념 의 폭발 때문에 한 전향이라 변할 길이 없었다.

그동안 감옥살이 유치장살이도 여러 차례 하였다. 그러나 다시 밝은 세상 에 나와서 아이들과 대하여 교편을 잡을 때는 여전히 총독부 당국에서 엄금 한 바의 반만년 조선 역사의 거룩한 자태를 알으켜주고 이 거룩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자랑을 아이들의 마음에 배양하였다.

삼십 고개, 사십 고개 ─ 인생의 가장 가치있어야 할 고개 고개들을 송선 생은 이 촌에서 저 마을로 ─ 저 마을에서 또 다른 부락으로 ─ 지식의 주 머니를 줄줄 흘리면서 그 흘린 지식을 남이 주워가기를 열망하면서 표랑하 였다.

치자(治者) 당국이 의식적으로 말살코자 하는 ‘조선학’의 지식은 송 선 생의 힘으로 북조선서 조선의 촌락 촌락에 심어졌다.

그의 꽁한 태도가 송 선생이라기보다도 송 첨지라는 편이 적절하겠으므로 어느 지방에서 시작된 칭호인지 모르지만 어느덧 송 첨지라는 칭호로써 북 조선의 촌락 촌락에 그의 이름은 꽤 널리 퍼져 나갔다.

그러나 송 첨지가 유명해지면서 유명해지느니만치 송첨지가 흘리고 간 지 식 부스러기는 당국의 입장으로는 역한 것이므로 당국이 송 첨지에 대한 탄 압도 차차 강화되고 노골화하였다.

마지막에 당국의 탄압이 하도 세밀해지므로 송 첨지는 국경을 넘어서서 만 주 땅으로 들어갔다.

송 첨지의 나이 그때 서른여덟 ─ 동양의 천지에는 소위 ‘지나사변’이라 는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. 그리고 중국은 서울을 중경(重慶)으로 옮겨 놓은 때였다. 한국 임시정부 ─ 중국 국민정부의 비호 아래 보호되어 있던 한국 임시정부도 중국 국민정부와 함께 중경에 가 있었다.

혁명가도 아니요 정치가도 아니요, 다만 열렬한 애국자로 교사로 지도자로 만주 일원의 조선인 사회에는 송 첨지의 이름은 꽤 높고 널리 전파되었다.

위엄성 있는 지도자가 아니요, 무엇을 강요하는 혁명가도 아니요. 일반 대 중과 무릎을 겯고 마주 앉아서 토론하여 가면서 애국사상을 배양해주고 동 족애의 관념을 길러 주는 송 첨지(선생도 아니요 주사도 아니요 단지 웃댁 형님, 아랫댁 아우님이라 부르고 불릴 수 있는 친애한 동무)는 만주 일원의 조선 사람 사회에서는 인제는 없지 못할 지도자였다. 나이도 사십을 지났으 니 경의를 표하기에 남부끄럽지 않고 아무런 홀대를 할지라도 나무려워하지않으니 어떤 좌석, 어떤 회합의 틈에라도 섞일 수 있었다.

지나 대륙에서 여러 해 동안을 계속되던 인류의 잔혹한 행동 ─ 전쟁은, 그 무대가 바꾸이면서 태평양 상으로 넘어가서 인종으로는 백인, 홍인, 흑 인까지 뒤섞이어 유사 이래의 최다량 살인 행위가 벌려져 나갔다. 일본인이 이르는 바 소위 대동아전쟁이다.

이십 소년시대부터 사반세기 간을 조선인의 마음에 민족애가 불일어서 민 족적 대동단결을 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으로 향상시켜 우수한 민족으로 하 여금 일본에게 빼앗겼던 국민을 회복할 기회를 지어 보려고 노력하여 온 송 첨지 ─ 잃어버릴 때에 아까운 줄 모르고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처음 몇 해 역시 아 깝지도 않고 통분한 줄도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어 감을 따라서 나날이 국권 회복의 야심이 늘어 가고 국가 독립의 욕심이 강하여 감을 통절히 느껴졌 다.

나이 반 구십 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에 앉아서, 바라건대 내 생전 에 독립 국가의 국민이 되어 보기는 가망이 천 리다.

지금 한창 강성한 일본의 실력으로 보아 무력적으로 일본이 꺼꾸러질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. 하늘에서 무슨 기적이 내리기 전에는 내 생전 조선 독립은 다시 볼 수 없는 일이다.

이러한 때에 그 새 중국과 오 년간이나 싸워서 기진맥진한 일본이 세계의 부강국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한꺼번에 싸움을 걸었으니 일본에도 군략가 가 있고 정치가가 있는 한에는 이번의 전쟁이 절대로 일본의 패배로 돌아갈 것은 숫자가 넉넉히 증명할 것인데, 스스로 이 망동을 한 것은 자진하여 자 멸지책을 취한 것이다 ─. 이는 하늘이 조선에 자주를 주려는 조짐이 아닐 까.

만년(晩年)에 들면서 차차 미신과 운명론에 기우는 자신을 스스로 조소하 면서도 이러한 꿈밖엣 꿈을 생각해 보려는 자신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가 없 었다.

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이번 전쟁의 결과로서 조선이 일본의 굴레에서만은 벗어나게 될 것이다.

조그만치라도 내 실력만 있으면 이러한 절호의 기회에 온갖 세력 다 물리 치고 조선 혼자서 스스로 설 기회를 지우 수 있으련만.

많은 고생을 한 탓인지 오십까지는 아직 수년간 남아 있지만, 송 첨지는 어떻게 보면 육십에 가까운 노인같이도 보였다. 그리고 최근 갑자기 체력이감소되고 원기 없어짐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.

소위 대동아전쟁은 저편이 잠잘 동안에 내려친 첫번 일격만은 원기 좋았으 나, 그 다음부터는 꾸준히 일정한 속도로 쫓겨 돌아온다. 이 속도로 보아서 1945년을 넘기지 못할 것만은 인젠 확정적으로 되었다.

1945년 팔월 초순.

송 첨지는 만주의 어떤 시골서 앓고 있었다.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 었는데 날이 경과하자 병세는 더 침중해 가는 뿐이었다.

부근의 노인들이 이 소탈한 지도자의 병을 구원하고 있었다.

“첨지, 좀 어떠셔요?”

“네. 고맙소이다. 나는 이제 다시 일어나지 못할 몸이지만 전쟁도 내 보 기에는 인젠 한 달을 더 못 계속 될 터인데 조선 독립의 보도나 행여 듣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는데.”

“그렇게 독립이 되리까?”

“됩니다 꼭 됩니다.”

“내일 오정에 무슨 미증유의 중대 방송이 있다는데요.”

“네? 미증유의 중대 방송?”

송 첨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.─ “내일 오정에 그 라디오 좀 들어다 주세요. 꼭 좀.”

이튿날 오정, 송 첨지의 부탁으로 라디오를 지키던 노인은 일본 유인(裕 仁) 황제의 미증유의 중대 방송의 첫 구절만 듣고 이 미증유의 기꺼운 소식 을 속히 지도자 송 첨지에게 알리고자 달려들어왔다.

그때는 송 첨지는 심이(心耳)로서 그 방송을 알아듣고, 기쁨과 감격을 금 치 못하여, 소리쳐 통곡하다가 거기 엎드러진 채 세상을 떠난 삼사 초 뒤였 다.

(〈白民[백민]〉, 1946. 1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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